2024년 12월 14일 토요일 오후 5시,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이날 한국 국회 앞에 무려 200만 시민이 모인 가운데, 탄핵을 통과시키는 데에 필요한 국회의원 수 200명을 가까스로 넘긴 204표의 표결 결과로 윤석열 씨는 대통령으로서 직무가 정지되었다.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의 경악스러운 비상 계엄령 선포 후, 매일 평화적으로 저항해온 많은 시민들이 환호했다. 기쁨의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다시 만난 세계’(소녀시대) 노래를 같이 불렀다. 오래 기억될 한국 현대사의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시민들은 헌법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되새겼다.

12월 14일까지 12일간 영하 날씨에 이어진 국회 앞 항의

불법적이며 반헌법적인 계엄령을 선포한 12월 3일 밤 10시 23분의 친위 쿠데타 후, 윤석열 탄핵소추안의 첫 번째 국회 표결은 12월 7일 한 차례 부결된 바 있다. 있어서는 안 될 계엄령 선포 12월 3일로부터 11일이 지나서 대통령 탄핵이 가까스로 통과되기까지, 많은 이들이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쿠데타 당일 6시간여 만에 대통령의 계엄이 해제되었어도, 2차 계엄이 다시 언제든 시작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컸고 첫 번째 탄핵 표결 때에도 100만 명이나 시민이 모였지만 여당 의원들의 투표 불참으로 표결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많은 시민들이 국회 앞으로 매일 가서 국회로 다시는 군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국회를 지켰고, 매일 밤 국회 앞과 여당 당사 앞으로 가서 시위를 계속했다.

기나긴 악몽과도 같았던 군부독재 정권의 폭압을 이기고 살아낸 나이든 시민들, 군사 쿠데타가 매우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민주화 이후 세대 젊은 시민들이 다 함께 용기를 냈다. 영하의 추운 겨울 날씨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용기가 되어 행동에 나섰다.

헌법 위반 계엄령으로 윤석열 대통령 결국 직무정지

친위 쿠데타의 전모가 아직 다 밝혀진 것은 아니나, 지금까지 분명한 점은 12월 3일 계엄령 직후에 군인을 태운 헬기 여러 대가 국회 상공에 나타나 군인들이 국회로 진입했으며 밤 12시에는 국회로 무장한 군인들과 장갑차가 투입되었고, 경찰을 동원해 계엄령을 해제하려고 국회로 오던 국회의원의 출입을 막았다는 사실이다. 12월 14일 국회에서 의결된 탄핵소추안에는 “윤 대통령이 자신과 배우자의 각종 불법 행위 의혹 및 정국 운영 실패로 인한 곤경을 타개하기 위해 계엄을 선포했다”, “윤 대통령의 행위가 국민주권주의, 대통령의 헌법 수호 의무, 군인의 정치적 중립 등 헌법 조항을 위반했다”고 쓰여 있다. 헬기 24대와 무장 병력 297명을 동원해 국회를 봉쇄하고 의원들을 체포하려 한 점이 ‘쿠데타성 내란’이라고 규정된 것이며, 형법과 계엄법 위반 8개 항목, 대의민주주의, 언론출판집회결사 금지 등 헌법 위반 16개 항목이 적시되었다.

이밖에도 계엄 계획이 적어도 12월 1일 이전부터 주도면밀히 사전검토되었다는 점, 계엄 계획 안에 북한을 도발하여 국지전을 벌이려 했으며, 국회의원과 시민들을 불법 구금하기 위해 지하 벙커를 마련하려 했다는 충격적인 의혹 등이 있는데, 이는 아직 조사 중에 있다.

“옳은 일을 하고 있다”

계엄령이 선포되자마자 바로 국회 앞으로 달려온 시민들은 국회의원이 계엄 해제 표결을 위해 국회의 담을 넘을 수 있도록 도왔고, 군용차와 장갑차, 경찰버스를 막아섰다. 20대 초중반 군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붙잡고 “절대로 사람을 해치는 나쁜 짓을 하면 안 된다”고 설득했다. 국회 앞에서 맨몸으로 밀려드는 군인을 막고 나선 이들은 군사독재 시대를 경험한 세대가 많았고, 개중에는 택시를 타고 온 남자 중학생 2명도 있었다. 또 계엄이 해제된 직후부터 매일 밤을 새며 삼삼오오로 국회의 출입문 앞을 지킨 이들은 고등학생, 대학생들이었다.

탄핵소추안 1차 표결이 예정되어 있던 12월 7일 자정에 국회 출입문 중 하나를 지키던 두 명의 여고생은 기말시험을 앞두고 있어서 출입문 앞에서 시험 공부를 하고 있었다. 국회 근처를 취재하던 유투버의 방송에 나와 “울산에 살고 있는데 여기 왔다. 아빠한테 혼이 났지만, 저는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밝혀 응원과 지지의 목소리가 쇄도했다.

여당 국힘당 당사 앞까지 행진 - 젊은 여성들의 힘

12월 4일부터 12월 14일까지, 국회 앞 시위와 행진이 매일 저녁 되풀이되었다. 시위와 행진에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많이 모였지만, 특히 10대 후반과 20대 초중반 젊은 여성들이 많이 모였다. 한국 시위 문화의 상징인 기존의 촛불 대신에,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의 응원봉을 들고 모인 여성들의 힘은 대단했다. 12일 동안 이어진 국회 앞 시위와 여당 당사 앞으로 향하는 행진에서는 언제나 반짝반짝 빛나는 각양각색의 응원봉을 들고 있는 젊은 여성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국회 탄핵 가결 통과에는 여당이 캐스팅보드를 쥐고 있었기 때문에, 여당 국회의원들에게 윤석열 대통령 탄핵 투표 참가와 탄핵 찬성을 압박하기 위한 여당 ‘국민의 힘’ 당사 앞까지 행진이 무척 중요했다.

한 사람 한 사람 힘을 합쳐

한편 어떤 시민들은 집회장에 핫팩을 대량으로 사 와서 나누었다. 집회에 못 오는 시민들은 집회에 나오지 않아도 늘 뉴스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유투브로 중계되는 집회 장면을 유심히 보았다. 또 참여한 이들을 위해 국회 근처의 카페나 제과점, 식당 등의 음료, 음식을 미리 결제해두고 집회 참가자들이 배가 고프거나 추우면 언제든 가서 자유로이 먹을 수 있도록 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시민들부터 유명한 아이돌 연예인들까지 이러한 선결제에 동참했다. 이렇게 음료수나 음식 값이 미리 지불된 가게를 안내하는 지도 알림 사이트가 만들어져 널리 알려졌다. 아기가 있는 한 여성은 자신의 휴가비용을 털어서 엄마들이 아기 기저귀를 편히 갈 수 있도록 전세버스를 대여해 국회 앞에 정차시켰다.

시위 때마다 자신이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한 재치있는 깃발을 들고 참가한 시민들이 많았다. 추위에 지친 시민들에게 웃음을 주고 용기를 불어넣고자 ‘전국 집에 누워있기 연합(내향인)’, ‘고양이 발바닥 연구회’, ‘TK 장녀 연합’, ‘스파게티 몬스터',‘방구석 오타쿠’ 등의 깃발이 집회장에 나부꼈다. 시위 참가자들이 늘면서 국회 인근 건물에서는 화장실을 자유롭게 개방해주었다. 서로에게 용기가 된 이들이 있어서, 많은 시민들이 아직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 느꼈다.

1980년 광주를 기억하는 이들 -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구한 것일까

2024년 12월 12일, 시민단체가 설치한 집회 촛불문화제 무대 시민 자유발언대에 오른 50대 남성. 전두환이 저지른 1980년 5월 광주 학살 사건(광주민주항쟁) 때 중학생이었다는 이 남성은 흐느끼며 증언했다. “저는 13살 때 광주에서 광주 시민들이 군인들에게 잡혀 끌려갈 때, 시민들의 그 절망스러운 눈빛을 보았다. 지금까지 단 하루도 잊어 본 적이 없다. 돕고 싶었지만, 총을 든 군인들이 무서워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붙잡힌 시민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결국 알지 못한 채, 죽 내 마음에 빚으로 갖고 살았다. 국회에 군인들이 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국회로 한걸음에 바로 달려오지 못한 나를 자책했다. 그래서 이제 매일 국회 앞으로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집회장에 앉은 시민들은 “괜찮아, 괜찮아” 외치며 남성을 격려했고, 이 남성과 시민들은 “불법 계엄령을 선포한 대통령은 반드시 탄핵, 체포해야 한다”고 외쳤다.

12월 3일 국회에 쿠데타를 위해 계획된 헬기 24대 전부가 오지 못한 이유는 당시 눈이 흩날리던 악천후 날씨 때문인 것으로 관련 전문가가 추측하고 있다. 일부 군인들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항명이나 소극적 태업 등을 하긴 했지만, 만약 헬기가 단시간 내에 국회로 더 들어오고 군인이 더 투입되었더라면 광주의 비극은 재현됐을는지도 모른다.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구한 것일까.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리며 이름도 사랑도 없이 세상을 떠난 이들, 그 아까운 목숨 하나하나를 마음속에 소중히 기억하고 기꺼이 서로의 용기가 되어 크고 작게 행동한 무명의 많은 이들 덕분에 한국의 민주주의는 더는 후퇴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두려움과 슬픔 속에서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용기

국회의사당 앞으로 100만이 모인 12월 7일, 200만이 모인 12월 14일. 끝없이 밀려드는 인파로 인해 국회 근처 역에 전철이 정차하지 않자, 많은 이들이 걷고 또 걸어서 국회 앞으로 갔다. 유모차를 끌고 한강 다리를 걸어서 국회로 온 이들이 있었고, “계엄이 대체 뭐냐”고 묻는 초등학생 자녀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부모가 있었다. 처음 오는 낯선 길에 책가방을 메고 지도앱을 켜고서 친구와 손잡고 열심히 걷던 10대 학생들이 있었고, 군사정권 시절 전투경찰의 폭력적 진압에도 굴하지 않은 학생운동 세대도 있었다. 두려움과 슬픔 속에서도 더 나은 세상을 바라기를 멈추지 않은 수많은 이들의 마음이 곳곳으로 퍼지고 있다.

앞으로 윤석열 씨의 탄핵소추안은 헌법재판소의 심판을 거치게 되며, 3달(최장 180일) 내에 재판관 6인 이상 찬성 때 최종 결정된다. “불법 계엄이 통치행위”라고 주장하는 윤석열 씨는 파면될 것이고, 그가 상징하는 반민주주의와 평화 파괴 역시 역사의 뒤안길로 곧 사라질 것이다. 윤석열 탄핵안 가결 후 국회 앞에서 미리 준비해둔 꽃(더욱이, 가시를 이미 정성스레 손질해둔 장미)을 국회 앞 시민들에게 한 송이씩 나눠주며 “축하합니다”라고 외치며 즐거워하는 젊은 여성들을 보고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직감할 수 있었다.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 마 / 눈앞에 선 우리의 거친 길은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 바꾸지 않아 포기할 수 없어 /(중략) / 이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수많은 알 수 없는 길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언제까지라도 함께 하는거야 /다시 만난 나의 세계” 12일간의 집회 때 국회 앞에서 가장 많이 울려 퍼진 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 가사 중

WAN 서울 특파원 오월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