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학회 40주년을 돌아보며
창립 40주년을 마음껏 축하해보려 합니다. 흔들리는 여성가족부의 위상을 생각하면 거뜬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여성학회는 참으로 든든합니다 .
40여 년 전 칙칙한 넥타이 부대들과 지내는 것이 힘들 때면 이웃 여자대학교 캠퍼스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사회학과 조형 교수실을 들락거리면서 <또 하나의 문화>를 만들었고 여성학 관련 소식을 누구보다 빨리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아주 암울한 시대였지만 국가 경제는 크게 성장하였고 “아들 딸 차별 말고 둘만 낳아 잘 키우자”라는 인구정책에 따라 딸들이 대거 대학에 입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사회로 나가면서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시점이었습니다.
1985년 창립 제1회 학술발표회의 주제는 <한국 여성학의 보편성과 특수성 - 종교상에 나타난 여성관>이었습니다. 종교의 가부장성에 대한 논의를 시작으로 성평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장이 열렸었지요. 명석하고 영민하고 위풍당당하고 멋진 여자 선배 학자들을 한자리에서 만나 든든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개회사에서 윤후정 회장은 여성의 문제란 누구든지 사람답게 사는 ‘인간화’를 목표로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은총과 권리를 받았고, 이 사회 어느 계층의 어느 누구도 억울하게 살거나 인간답지 못하게 사는 경우가 있다면, 이는 고쳐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동등한 기회 하에서 서로 의존하고 협력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여성문제를 생각할 때, 요즈음 여성의 70~80%는 가정에서 지내야 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해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 구조나 가족제도는 여성을 직장생활을 할 수 있게 하지 않습니다.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우리의 가치관이나 행동이 옳다고 한다면, 이에 저해 요인이 되는 사회 구조와 제도를 해결하고 뚫어나가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당시로서는 체제에 균열을 내자는 엄청난 선언이었지요 .
40년이 지난 지금 윤후정 회장의 동등한 기회에 대한 소망은 일정하게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여대생들의 사회 진출은 해마다 불어나 ‘알파걸’이라는 별명이 생기기도 하고 주눅이 든 남성들이 반격을 가해올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서로 의존하고 협력하는 사회는 만들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 ‘인간화’ 라는 단어가 문제적인 듯합니다. 연세대학교에서 저와 동료들이 개설한 과목명이 <남녀평등과 인간화> 였지요. 멋진 과목명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간 여자들이 사회성원권의 상당한 부분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 것은 분명하지만 경쟁과 적대에 기반한 사회체제를 바꾸어내는 데는 역부족이었던 것이지요. 이 자리에서 고백하지만 저는 여성학회가 생긴 지 십 년 뒤인 1996년에 여성학회가 재미가 없어서 오지 않겠다고 말하여 소동을 빚은 적이 있습니다. 여성학이 기존 체제에 균열을 내지 못하고 ‘끼어들기’에 급급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고등교육을 받은 여자들은 때마침 들이닥친 신자유주의 돌풍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
윤후정 회장은 3,000여 년 동안 여성문제가 있어 왔는데 몇백 년 전 만이라도 여성들이 지금과 같은 각성을 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는 말도 하십니다. ‘가부장제 3천년’ 을 머릿속에 두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캐런 암스트롱의 <축의 시대> 를 참고하면 거대 종교가 출현한 기원전 800- 300년쯤에 유일신을 믿는 노예제사회가 자리를 굳힙니다 . 만물에 살아있던 영혼을 쫓아내고 (애니미즘) 인간들이 절규하여 부르면 늘 나타나던 신 (샤머니즘) 도 사라집니다. 유일신의 이름 아래 중세 절대 왕권을 비호하며 가부장성이 강화된 시기이지요. 그 후 인간은 거추장스러운 신을 죽이고 그 자리에 남성적인 기술과 자본을 앉힙니다. 한 때 모두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했던 민주주의는 첨단 감시 기술과 자본의 힘에 의해 붕괴하고 국가는 폭력배 조직으로 전락합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생물학적 터전을 숨이 막히는 속도로 파괴한 종의 이름은 인류이고, 그들이 망친 시대를 우리는 ‘인류세’ 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여성학자들이 이 분야의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페미니스트 작가 마가렛 에트우드는 “인간 멸종은 파국이 아니다, 종말을 맞이한 건 인간이 아닌가?”라고 말합니다. 인간인 것이 부끄러운 시대가 왔습니다. 그래서 창립 40년이 지난 이 자리에서 우리는 인간화가 아니라 ‘탈인간화’를 이야기합니다. 식물, 동물, 광물과 기계를 포함한 지구에 존재하는 다종다기한 존재와 관계 맺기 시작합니다. 다나 해러웨이는 ‘실뜨기 놀이’를 권합니다. 불안과 전투의 은유 대신 관계성 형성을 위한 비유, 공명에 맞추어진 지식을 생산하자고 말합니다. 자기 능력과 한계를 인식하고 지구의 한 생명체로 살아가기 위한 국지적 지식을 만들어내는 ‘겸손한 목격자’로 말입니다. 철학자 로지 브라이도티 역시 남자처럼 싸우지 말 것을 부탁합니다. “페미니즘 문화 전쟁은 미국에 두고 가져오지 말라”고 말하면서 비상할 것을 권합니다. “말려들지 말고(disengaging) 거리를 두고(distancing) 해독(detoxing) 하자면서요.
일런 마스크는 지구를 떠날 테지만 우리는 지구를 떠나지 않습니다. 대신 인류세, 기후 위기, 돌봄에 관한 공부를 합니다. 확산의 욕망이 아니라 회복력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원자폭탄으로 파괴된 폐허 속에 자라난 송이버섯에 대한 안나 칭의 책을 읽는 이유입니다. 고정된 주체는 없습니다. 상호작용 속과 맺어지는 관계가 있을 뿐이고 대대로 이어지는 생성소멸의 생명이 서로를 연결하고 지탱하며 살아갑니다. 지구 생활자 공동체들이 늘어나 폐허가 된 땅이 푸르러지고 있습니다. 여성환경연대 소속 <달과 나무> 연구소에서 <우리는 지구를 떠나지 않는다>는 책을 펴냈습니다. 이 책이 많은 여성의 마음을 움직이면 좋겠습니다. 1970년대 제2차 대중 페미니즘 운동이 책방 중심으로 불같이 일었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같은 일이 벌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 세대가 지구의 일원으로 나름의 생명의 꽃을 피워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인 것을 부끄러워했던 박완서 선생님을 그리며, 그 많던 페미니스트 선배들과 후배들을 떠올려봅니다. 그리고 새 세대 페미니스트들을 맞으며 다시 한번 여성학 40주년을 온 마음을 다해 축하합니다.
2024년 6월 10일 조한 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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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번역/日本語訳版:https://wan.or.jp/article/show/11316